2011년 10월 2일 일요일

도가니, 2011 by 황동혁


역시 영화관에 가는 일은 용기를 요구한다. 아트레온은 광고가 없다는 걸 잊고 정시에 들어갔는데 내 자리에 연인이 앉아있어서 그냥 그 뒤에 앉았다.  역시나 영화가 시작되고 5분쯤 지나서 아줌마가 일행 한 분과 동행하고 내 어깨를 치며,
"여기 자리 맞으세요?"
"영화 시작했는데 아무곳이나 앉으시지요."
"안돼요 여기 우리 자린데."
기준은 없다. 난 연인에게 나의 자리를 요구했고 결국 너덧명이 엉덩이를 들었다. 나만 아무데나 앉아버려도 될 만큼 자리는 많았지만 조금 못마땅한 마음에 그리하여버렸다. 
다행히 연출이 여타 한국영화보단 질질 끌지 않아서 금세 잊었지만 일반적인 극장예절이란게 생기는, 아니 영화 보러 온 사람들 일반이 다른 사람의 관점을 생각하는 날은 오지않는 걸까? 

  공유의 눈 빛이 참 좋다. 그리고 연출은 그걸 과다사용 했다. 비슷하게 병역을 마친 미남배우 천정명이 생각 나는데, 공유가 더 많이 좋은 배우가 되었으면 좋겠다. 성장하는 인격이다. 
  영화 내내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했다. 친구들이 불편하다고 하는 지점이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모든 장면이 불편하기 보단 답답하고 인상을 쓰게 했다. 이는 공유를 소극적 관찰자로 둔 것이 크게 관여 했는데 좋은 스탠스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그래서 공유가 박선생의 머리통을 화분으로 내려칠 때에도 통쾌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 내내 눈에 눈물을 깔고 있었는데,일종의 책임감같은 것과 이 정글 안에서 나는 어떤 놈이될 수 있나에 대한 고민때문이었다. 긴 정적 테이크에서 마이너 코드 연주곡이 안 깔려 있었다면 좀 더 편하게 울었을텐데 아쉽다. 
  먼저 일종의 책임감이란, 이 이야기는 저 멀리 무진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고 한국 어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란데서 시작된다. 형태는 다르지만 뭉뚱그려 매커니즘이 같다는 의미도 있지만, 장애인에 대한 성적 비행이란것, 나도 지나친 적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쳤을 장애인에 대한 학대. 그건 무진이 아닌 어디든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 사회와는 독립적으로 순수하게 개인의 역량으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듯, 동등한 사람으로서 대우 받지 못하는 일도 단순히 장애가 있고 개인이 주체성이 없어 일어나는 일은 아닌 것이다. 눈 감았던 내가 싫었다. 
  또 다른 씁쓸함은 이 정글 안에서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건 둘채 치고라도 앞으로 이겨서 많이 가짐으로써 불안을 극복할 건지, 다른 사람과 모두 연결 되어있단 사실을 지속적으로 염두에 두며 살아갈 건지 내가 대체 어떤 놈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느꼈다. 태어나서 20여년간 나는 세상이 싸워이겨나가야 할 대상인줄 알았다. 나의 환경이 황무지같아서 이기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걸 암흑처럼 두려워하며 스스로에게 채찍질을 가했다. 달리다가 거대한 사회를 눈 앞에 맞닥드리고는, 고민했다. 톱니바퀴에 끼어 돌이길 뿐인 주체성없는 나를 보았다. 대학에 가고 젊어서 가진것도 없고 집에서 어머니가 등골 빠지게 일해서 보내주시는 돈을 받아 편하게 앉아 책을 읽으니 사회가 넓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런건 인류 진화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의심했다 나의 진보성은 지적허영과 어설픈 연민에서 비롯된 가짜일수도 있다고. 지금 내가 믿는 것들이 나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 나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을 받아들이고 모든이들을 타자화하며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일 뿐인 세상이었다고 인간 이성은 가식이었다고 다른 사람들의 살을 뜯어먹고 피를 받아마시며 더 강해지길 바랄지도 모른다고. 
  얼마 전 부터 누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좋은 사람이 되는것' 또는 '좋은 아빠가 되는 것' 이라고 대답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공유가 "여기서 이 아이 손을 놓으면 나 소리한테도 좋은 아빠될 자신 없어." 라는 대사가 머리를 맴돈다. 그 말이야말로 우리가 공유해야 하는 가치다. 9살짜리 아이가 - 그 아이가 여자든 남자든 장애인이든 - 노출 되어있는 사회란 곳이, 나의 아이는 배타적으로 좋은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란걸 깨우쳐줄 수 있는 일이 많이 일어나야 한다. 일부 사회에선 누가 부모든 상관없이 공동양육을한다. 내가 10살짜리 아이가 나보다 힘이 약하다고 패버리면, 그런 가치관이 용인되는 사회라면 어디선가 내 아이를 패고 있어도 용인할수 밖에 없어야 한다. 
  우습고 순진하고 낭만적인가? 여전히 나는 신을 부정하고 미신을 멸시한다. 우연의 연속에서 의미있는 고리를 찾으려는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서도 연민한다. 하지만 그런일은 일어난다. Magnolia에 나오는 'It did happen'이다. 어이없게 연결되는 그래서 인과응보다라고 교훈삼을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난다. 그 사건들이 상관 관계가 있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자. 지금 아이패드에 글을 쓰고있는데 내가 이 아이패드만한 면적에 1픽셀의 점을 하나 찍고나서, 아이패드의 그 픽셀을 향해 다트를 던져서 맞출 수 있는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아니 확률이란것을 좀 더 생각하면 무한에 가까운 시도도 픽셀을 정확히 맞출 순 없을 지도 모른다. 따라서 제로라고 하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내가 애초에 하필이면 그 픽셀을 찍을 수 있었던 가능성은 무엇인가?
  불안과 욕심은 그 것을 막거나 채우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을 줄어들게 함으로써만 채워진다. 줄이려는 노력을 한다면 넓게 볼 수 있다. 한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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