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7일 화요일

Heat 1995 by Michael Mann



페이크 리뷰.


  오랜만에 감성 수준이 높다. 90년대 노랠 찾아 헤메이다 이것 저것 틀어봐도 눈물은 나지 않는다. 찔끔. 10여년 전에는 넘치는 감정에 어쩔 줄 모르면서 시를 쓰거나 Mariah Carey & Boyz II Men 의 'One Sweet Day'를 실제로 천번도 넘게 들으면서 멍하니 있기도 했다. 인간종의 감성의 수준이란게 나이에 따라 일정한 그래프를 그려서 유전자 전달체에 불과한 성체 한 마리가 그 수준을 벗어나봐야 오차범위의 오차 정도밖엔 안된다 해도 말라가는 감성을 느끼면 아쉽다. '돌이켜 보면 그때 좋았다'가 아니라 멍하니 같은 노랠 천 번이나 듣고 있었을 때, 그때 나는 행복했다.

  2개월 전 시네마테크에서 시네바캉스 프로그램으로 히트를 틀었는데, 릴을 잘못 빌려와서 사운드가 모노이고 중간에 CG인지 크로마키인지가 날아가있는 화면이 있어서 무료 상영을 했었다. 그 때 히트를 처음 보고 집에서 여러번 다시 봤다. 모노 사운드임에도 영화는 굵직하게 가슴을 관통했고, 집에서 총격신의 '진짜' 총 소릴 들었을 땐 또 다시 흥분했다. 이제껏 가장 완성도 높은 영화는 코엔 형제의 O Brother, Where are Thou? 라고 줄곧 생각했는데 이 영화와 견주라면 견주기 싫다고 해야지. 

  두 남자가 있다. 닐(로버트 드리로 분)과 빈센트(알 파치노 분) 둘은 각각 전문 강도단 리더와 형사다. 한탕하고 튀고 뒤를 밟고 쫓는다. 둘 다 자신의 분야에선 최고다. 둘 다 인생의 에너지가 '일'로 몰리니 삶에 안정성이 없다. 움직인다. 정착하지 않는다. 또는 못 한다. 


  "You wanna make be makin' moves on the street, have no attachments, allow nothing to be in your life that you cannot walk out in 30 seconds flat if you spot the heat around the corner, remember that?"


  "Our problem is take the bank or split right now. Do not go home, do not pack. Nothing. 30 seconds flat, now we're gone on our separate ways. That's it."

DJ Shadow의 [Entroducing..] 앨범 중 Stem Long Stem (Cops' 'n Robbers' Mix) 을 들으면 '히트'의 주~ 옥같은 대사들이 샘플링 되어있다.

  그러다 닐은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손을 씻으려한다. 빈센트는 세번째 아내와의 관계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하고 만다. 작은 실수도 용납안하는 냉철한 두 남자에게선 감정적인 인간적인 모습은 없다. 그들은 대면하고 서로 같은 류의 인간임을 확인한다. 



여기 또 다른 영화가 하나 있다.



  같은 해에 개봉했고, 데이빗 핀처가 연출했다. 데이빗 밀스(브래드 피트 분)과 윌리엄 소머셋(모건 프리먼 분)은 둘 다 형사다. 밀스는 아내가 있고 소머셋은 현재 없다. 소머셋은 은퇴를 일주일 앞 둔 베테랑 형사다. 냉철하고 연륜이 꽉 찼다. 침착하게 계산한다. 수습 불가능하면 벌이지 않는다. 반면 밀스는 쉽게 흥분하고 감성적이다. 마지막 부분에 밀스가 범인에게 발포하기 전 클로즈업이 압권이다. 얼굴 퀄리티 다르고 동양적인 맛이 나지만 나는 그 연기를 꽤 잘 따라 할 수 있다. 그걸로 기적의 오디션 나갈까 했었다. 


근데 영화가 또 있네.


  1999년 개봉이고 역시 데이빗 핀처 연출이다. 브래드 피트는 타일러 더든이란 역으로 나오고 에드워드 노튼은 자세히 보면 이름이 없다. 옛날 영화니 스포일하자면 둘은 한 사람이고 다른 인격으로 표현된 것이다. 극단적으로 다른 인격 둘로.

 90년대 중후반 이런 이야기들이 유행이었나? 셋 다 남자 영화다. 남자는 늙어빠지기 전까지 누구나 불안정할 수 있다. 그 불안정성이 극단적인 자아 분열로 나타나든, 이성을 눌러버린 감성적 판단으로 나타나든, 아니면 끝내 한 여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남자가 되는 것이든 간에 그 이야기들이 남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경로는 크게 같다. 

  세 영화를 모두 본 남자라면, 어떤 선택에 직면했을 때 각 영화가 제공하는 두 인물들의 조합으로 6개의 옵션을 상상 해 볼 수 있다. 

1. 닐 / 빈센트
2. 밀스(감성적, 계산보단 명분) / 소머셋
3. 길들여진 시민(에드워드 노튼) / 타일러 더든(짐승)

  일단, 직면한 선택문제의 속성에 따라 1,2 또는 3을 선택한 후, 두 캐릭터의 선택을 가정하고 나타날 결과들을 전망한 뒤 마음에 드는 것을 따른다. 닐은 마지막에 차에 타지 않은 것으로 여자에게 단 하나의 사랑을 주었다고 보고 빈센트와 대비되는 것으로 생각하자. 

  저렴하게 예를 들어, 당신이 담배를 피우는데 1개월 쯤 사귄 여자친구가 당신이 담배를 끊지 않으면 앞으로 만나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1번 영화를 적용하면 닐이라면 10년쯤 피워온 나의 사랑 담배따위는 버리고 여자친구에게 사랑의 징표로 금연을 안겨준다. 빈센트라면 안녕하고 담배피우는 것에 대해 거리낌 없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된다. (영화에선 닐이 scores를 올리는데 반대네)

  2번영화의 적용은 이런것이 되려나. 당신과 여자친구는 매우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어느날 당신의 친구가 당신의 여자친구와 몰래 연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자친구는 저울질을 하는 것 같고, 당신의 친구는 강하게 대시해오는 것 같다. 문제는 당신의 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어필하기 위해 당신에 대한 거짓말을 조금 섞어가며 당신과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manipulate 했다는 사실이다. 이 때, 밀스라면 일단 당신의 친구에게 주먹을 좀 날려준다. 수습은 이후에 이루어지겠지. 수습이 잘 된다면 당신은 터프가이. 수습 안되면 쏠로. 소머셋이라면 당신의 친구에 의해 조작된 부분을 여자친구에게 명확하게 설명하고 친구도 잃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다. 

  3번 선택지의 예를 들기가 어렵다. 반값 등록금 시위? 에드워드 노튼이면 시위 안나가고 집에 있는 이케아 소파에 앉아 빵에 쨈 발라 먹고, 타일러 더든은 시위 나가서 경찰 버스 밑에 네이팜탄 설치한다. 

  이게 무슨 영화 리뷰냐. 나는 지금 나를 이야기 하고 있다. 왠만한 사람은 찾기 힘든 나의 고뇌가 이 활자들 안에 서려있다. 나의 감성이 쪼그라 들고 있다. 나는 인간적인 사람인데, 신자유주의 신봉국에서는 감성적이기만 한 사람은 낙오자가 되기 때문에, 깎고 깎아온 나의 감성의 가격이 이제 0에 가까워 지고 있다. 감성 충만하여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해도 철저한 계산하에 웃으며 구조조정 할 수 있는 경영 마인드가 있어야 시와 그림과 노래를 팔아먹을 수 있다. 아! 책은 정말 그런것 같아요.

  키타노 타케시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알았어요.


2011년 9월 19일 월요일

9월 15일, 외로움


  1년을 휴학하고 돌아오니 동기들은 모두 마지막 학기를 맞아 자기소개서 쓰기와 면접 준비에 바빴다. 나와 같이 3학년 2학기인 친구들 중에는 공인회계사에 합격한 친구도 있고 행정 5급 공채를 준비하는 친구도 있다. 빨리 졸업하고 싶은 마음에 전공 7과목을 신청했다. 수업이 끝나면 곧장 열람실로 간다. 답답할 때도 있지만, 달리 할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나약하게도 이미 해 놓은 학벌, 학점과 영어인증시험 점수 같은 숫자들로 남들처럼 사기업 입사 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런 내가 한심하기도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천천히 고민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며 산다.

  학생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요즘 다시 하루에 세 개비 정도 피우지만 끊어야겠단 생각만 하는 담배가 생각났다. 안 피우려고 일부러 담배를 집에 두고 온다. 빌릴 사람도 없어서 그냥 화장실 가서 이를 닦았다. 다시 자리에 앉아 책을 잡았다.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을 복습하니 한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중요한 개념을 복습하기에 앞서 한 시간 반쯤 공부하니 담배 생각도 나서 잠시 밖으로 나갔다. 열람실 밖의 광장에 있는 벤치에 앉아 서늘한 바람을 맞으니 담배생각도 가라 앉아 새로 담배를 사지 않기로 했다. 앉아서 아이패드로 트위터와 카톡을 하고 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몸집에 비해 큰 빨강-녹색 스트라이프 카라티에 빛이 바랜 베이지색 면 반바지, 거기에 욕실 슬리퍼를 신고 있는 할아버지가 다가왔다.
 
“Excuse Me?"
 
“네?”
 
“Excuse Me? 영어 못 알아들어?”
 
  그는 어깨에 통기타를 메고 있었다. 스트랩으로 맨게 아니라 넥 부분을 손으로 잡고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피아식별을 시도하고 이전의 경험에 빗대어 대상을 분류하려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타와 영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춘 것, ‘할아버지가 술 많이 마셨어요’ 라던 첫 마디에 경계가 풀렸다.
 
  그냥 자리를 뜰까 생각했던 건 2~3초간 쯤. 담배와 술 냄새가 역풍인 바람을 타고 나에게 왔고, 나는 곧 일어나 다시 공부를 하러 갈 참이었다. 내일 당장 시험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바쁘고 내 시간은 소중하다. 나는 자리를 피할 권리가 있다. 그래. 대학교 교정에 종종 있는 ‘유명인사’ 중 한명일 것이다. 거의 모든 학생들이 피하는 대상이니 나도 괜찮다.
 
  '하지만' 하고 생각 해 보았다. 내가 열람실로 돌아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일과, 이 노인이 낯선 사람에게 술기운에 자기 얘길 하고 싶은 마음과 저울질을 해 보니 아무래도 후자가 더 간절한 일이라는 생각에 일단 앉아 있기로 했다. 예상대로 몇몇 얘기들이 반복되었다.

 
  “고등학교 때 웬만한 공부는 다 하는 것이고 대학에 와서 한 분야의 전문지식을 배우는 것인데, 이 캠퍼스를 보면 4년 연애하러 온 것 같다. 나는 음악의 고수인데 한국 사람들은 음악을 들을 자격이 없다. 사람 많은 데서 내가 기타를 치면 머리 노란 사람들은 들으러 오는데 한국인들은 도망간다. 한국인들은 음악을 들을 자격이 없다."

  "내가 구청에서 기타 강습을 해 달라고 초대 받았다. 구청 사람이 나보고 명함을 만들라 하였다. 그래서 사진이 저 옛날 자라섬에서 찍은 흑백사진 밖에 없다 하니 예술가는 그게 더 멋지다며 좋아해서 그러라 했다. 나중에 명함을 보니 흑백이라 멋지더라. 내가 눈으로 직접 본 역사들이 많다. 옛날에도 재벌 아들들은 방위 가서 술집에 자기 대대장 불러다 놓고 술 먹고 돈 써서 2차 보내주고 했다. 거기 기타치고 노래하러 가서 내가 봤다."

  "음악은 혼이 들어가야 한다. 음악이 아니라 모든 일은 혼을 가지고서 해야 한다. 무슨 무슨 관현악단에 누가 들어오라 해서 가보니 어떤 기타리스트가 4년 배웠다는데 불구더라”
 
  "요새 한국엔 매국노가 많다. 옛날엔 부잣집 아이와 가난한 집 아이가 싸워도 각자의 부모가 만나면 함께 진상을 확인하고 잘못한 아이를 꾸짖거나 '그저 싸우면서 크는거죠' 하곤 했는데 요즘엔 돈 많은 부모는 무조건 자기아이가 잘했다고 하고 돈 없는 아이와 그 부모를 멸시하니 사람좋자고 돈 만들어 놓고 돈으로 사람을 평가하니 세상이 거꾸로 되었다. 내 말이 맞나 안맞나?"
 

  혀가 꼬이고 말하는 방식도 좀 특이해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런 내용 들이었다. 할아버지 말 대로 광장의 벤치에는 저마다 남녀가 꼭 붙어 앉아있어 아마 근처에 앉은 커플들은 조금 찔리거나, 노인네가 밤에 시끄럽게 한다고 불쾌해 했을 것이다. 백열등으로 분위기가 좋아 커플이 많이 앉아 속닥이는 캠퍼스 광장에 나와 기타치는 노인이 앉아 있다. 

  말로 거창하게 깔아 놓으니 이 할아버지 기타실력이 궁금했는데 마침 내가 얘길 잘 들어주니 이런 저런 연주를 해 보인다. 뽕짝, 롹이렇게 장르를 명명하며 줄을 튕기는데 뽕짝은 확실히 정확한 아르페지오였다. 연주할 줄 아는 악기는 하나도 없지만 화음과 불협화음은 인간이면 다 알아들을 수 있는건데, 롹이라며 튕기는 선율은 분명 코드를 잡았다가 아무래도 막치는 경향이 있다. 프랫을 잡지 않고 넥위에 손을 올려 튕기는 등 고난이도 처럼 보이는 동작을 마구 하니 소리는 엉망이다. 그러나 끝날 때 마다 그것이 ‘천상의 소리’ 라고 자화자찬을 한다. 자부심 만은 대단하신 분이다.
 

“노래 한 번 할까?”
 
“무슨 노래요?”
 
“구름”
 
“모르겠는데요, 누구노래에요?”
 

  곧장 시작한 본인 작사 작곡의 구름이란 노래는 가사가 괜찮았다. 할아버지가 쓴 것 치고는 말이다. 손자 얘기가 들어있었지만, 노래가 끝나고 부러 묻지는 않았다. 노래를 듣고 박수를 쳤다. 좋아하신다.

 
“번역한거 들어볼래?”

 
  곧장 시작한 본인 작사 작곡 번역의 Cloud란 노래 가사는 이전과 달랐다. sky, in the world, rain 이란 단어들은 들렸지만 이외에는 영어가 아니었다. 영어가 아닌 음가에서 샤우팅을 하실 때는 내가 다 민망했다. 바로 2m정도 앞에 앉아있는 커플의 남학생이 이쪽을 돌아보며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나름 노력하신 게 보여 그래도 감탄했다. 영어로 된 노래가 끝나고 아까 노래와 왜 가사가 다르냐고 물어봤으나 대꾸도 안하신다. 나중에 물어보니 미군부대 들락 거릴때 배운 영어라 하신다.
 

  할아버진 나보고 똘아이라고 했다. 캠퍼스 저 멀리서부터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말을 걸어보고 왔는데 다 도망갔다고 시간없다고 가버렸다고 자네는 술먹은 노인네 미친 소리 듣고 앉았으니 똘아이라고.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자네는 성질이 나면 두 세사람은 받아버릴 불같은 사람이지만 이렇게 가만히 앉아 미친소리 듣고 있는건 참는 것이라고. 사람이 참을 줄 알아야 한다고. 사람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자네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그런데 세상이 이상하니 자네 같은 사람이 똘아이가 되는 것이라고. 그리고 또 기타를 마음대로 치다 말다 하면서 자네는 욕심이 많다고 술먹은 노인네가 떠들어도 거기서 뭔가 배울게 있단 생각으로 인내하는걸 보니 욕심이 많은거라고 자네가 날 좋아해서 앉아있겠는 거냐고 한다. 외로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있었고 나는 슬슬 졸리기 시작했다. 노인이 신경쓸까 내 손목의 시계를 쳐다보진 않았지만, 노인이 차고 있는 시계를 보니 이미 한 시간 반쯤 지나 있었다. 내가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주는건 문제가 아닌데 이 상황이 잘 정리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머리를 굴렸다. 노인은 나에게 솔직했고, 순수한 사람이다. 그래서 솔직하게 ‘할아버지 나좀 졸려요’ 했다. 들은 척도 안한다. 안철수씨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또 기타를 친다. 그냥 리듬이 쫌 괜찮길래 ‘잘 들었습니다’ 했다. 돌아오는 대답이 ‘왜 갈라구?’ 라서 갈 수 없었다.
 

“자네 담배 안피지?”

 
  수중에 담배가 없으므로 그냥 ‘네’ 했다. 담배가 피우고 싶으신 모양이다. '한갑 사드릴까요?' 했다. 그러자 '한 개비만 있으면 되는데' 하셨다. 얘기하고 연주하는 동안 악수를 열 번 정도 하셨는데, 내가 그리 고마웠나보다. 오늘 횡재 했다고 하셨다. 세 번이나. 내가 가만히 얘길 들어드리는 것과 할아버지의 기쁨을 비교하면 경제학에서 이기적인 개인이야 어찌됐든 둘 사이에 엄청난 편익이 발생한 것 이다. 이렇게 얘기 들어줄 피붙이는 없는 것인가 생각했다가 그만두었다.
 

  다행히도 두시간 쯤 접어들었을 때, 이야기를 조금씩 매듭지으셨다. 기타를 공짜로 가르쳐주겠노라 하셨고, 집이 근처니 집앞까지만 데려다 달라 하셨다. '그러죠' 했다. 가는 길에 담배도 사 드린다 했다. 할아버지 집은 학교 정문에서 가까웠다. 걸어서 3분도 안걸렸던 듯 하다. 슈퍼가 세 개 쯤 있는데 할아버지가 가자는 가게로 들어가자 점원 아가씨가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집도 근처겠고 자주 오는 상점인가 했다. 할아버지 담배 뭐 태우세요 했는데 할아버지는 점원에게 ‘아니 요기 학교에 갔는데 내 얘길 들어주는 똘아이를 만났어’ 라며 좋아하셨다. 할아버지는 그분의 구름을 타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점원에게 ‘할아버지 태우시는 담배 뭔지 주세요’라는 눈빛을 보내니 점원이 한라산을 꺼내 들었다. 2,000원짜리 담배다. 돈을 내고 나서서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다.
 

  목에 걸려 있는 열쇠 꾸러미중 두 개를 골라 내 현관문 자물 쇠 두 개를 열고 안으로 들어서신다. 난 이제 그만 가려는데 할아버지가 잡는다. 아닌데 싶지만 경계심도 없고 안타까운 마음에 들어갔다. 반지하 방에 살림살이가 어지럽게 쌓여 있는 독거노인의 방이다. 처음이었다. 독거노인방문 자원봉사 같은 걸 가본 적이 없다. 그냥 이렇게 가까이 있는거구나 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곰팡이 냄새가 났다. 다시
 

“그만갈게요.”
 
“5분만 있다가. 더 이상 얘기 안할게.”

 
  신발을 신은 채로 계단을 내려가니 테이블에 의자가 두 개 있고 테이블 위엔 미역국 남은 것과 빈 디스 플러스 담배갑 두 개, 재떨이, 참이슬 오리지날 한 병, 소주잔 등이 놓여 있었다. 거실까지는 신발을 신고 다니고 창고 같은 두 방엔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시스템이었다. 디스 플러스 갑이 먼저 눈에 띄었다. 1백원인가 2백원 차이인데 일부러 싼 한라산을 사신게 아닌가 해서 그냥 마음이 안 좋았다. 거실에 높이가 1m가 넘는 2채널 스피커가 놓여 있길래 이거 소리 나오냐 물어보니, 할아버진 신나하시며 방으로 들어가 CD를 넣고 조작을 하시는데 CD가 튀니까,
 

“너도 곰팡이를 먹었구나! 이쌔끼!”

 
  조금 불편해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데 이윽고 익숙한 노래가 나온다. Scorpions의 Holiday다. 출력이 큰 스피커라 그런지 음원이나 기계장치는 어쨌든 노이즈 없이 좋은 소리가 나왔다. 할아버지는 방안엘 보라며 문을 열어주셨는데, 통기타 3대, 일렉트로닉 기타 2대 그리고 방이 워낙 어지러워서 뭔지 모를 사물이 있었는데 좋은 음향기기란다. 내가 보기로는 프로듀싱은 안되는 것 같고 그냥 고물 모아놓은 것 같은데 자랑하는 할아버지를 보니 그냥 좋다.
 

“쏘주나 한 잔 할려?”
 

  나는 손을 내 저었다. Holiday 노래가 끝나면 가야지 했다. 그 전까지는 노래를 즐겨야지 했는데 할아버지는 연신 떠드신다. 할아버지 모습은 무성영화라 생각하고 노랠 들었다. 너무 외로워 친구가 필요해 떠드는 걸 알기 때문에 더 안들으려고 했다. 노래가 끝났다. 일어서니 '자네 포도 좋아하나?' 묻는다. 자칭 예술가 할아버지랑 새벽까지 소주 먹으며 보낼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다. 근데 나는 조급하고 공부해야 하는 자칭 모범생이지 보헤미안이 못된다. 애써 전철을 타야 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집은 학교 뒤에 있지만 당산역까지 가야 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언제고 집에 와서 문을 두드리든지 전화번호를 써 놓고 ‘꼴통’이라 써 놓고 가라 한다. 보내기 아쉽다고 한다. ‘자네 반만 닮은 아들이 있으면 내가 천당에 갔지’ 하신다. 힘들게 웃으며 할아버지 집을 나왔다. 수 많은 감정들이 엵혀 입밖으로 나오지 못 해 한 번 꼬옥 안아드렸다. 무겁게 걸어 멀어져 가는데 집 앞에 우두커니 서 계신다. 내가 안보일 때 까지 서 계실거라 하신다. 이미 할아버지가 까마득 할 때 마지막으로 들렸던 말이 ‘자네 가면 소주 한잔 하고 울지도 모르지’.
 

  내가 과거 언젠가 우물안 개구리처럼 스스로 꽤 잘난 놈이라 생각했다면 할아버지가 처음 오셨을 때 일찍 자리를 떴을지도 모른다. 다시 열람실로 돌아왔지만 지금이라도 이 열람실에서 10분만 걸어가면 할아버지와 소주 한 잔 하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정당화 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지만 나는 여유가 없다. 나는 아직 그릇이 크지 않다. 누구의 잘못일까? 아무의 잘못도 아니다. 또는 모두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