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날씨라고 할 순 없지만, 오랜만에 비가 내려 쌀쌀하다. 그렇다고 따뜻하게 이것 저것 껴입어 가슴을 따뜻하게 하기엔 이른 그런, 가슴이 추운 날씨다. 얼마 간 연락이 닿지 않았던, 전 여자친구라고 해버리긴 너무 가벼운, 많은 걸 같이 했던 사람을 만나기로 한다.
옷을 고르다 밤으로 가는 날씨를 생각 해서 스웨터를 꺼내 들었다가 그녀와 만나던 때에 자주 입었던 기억이 나서 다시 집어넣고 별로 두껍지 않은 새로 산 블루종을 걸치고 나간다. 종로 3가, 꾸미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그런 마음으로 포장마차에 들어가 그녀도 배부르다기에 기본으로 나온 오뎅탕에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급할 것도 없이, 건배 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한 잔, 한 잔을 현재도 미래도 묻지 않고 지난 날의 얘기나 이따금씩 꺼내며 조용히 기울이고 있노라니 움츠렀던 가슴과 몸을 감싸고 있던 팔이 풀리고 조금의 긴장도 없어진 웃음이 나의 얼굴에,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서린다.
불 같이 화냈던 일, 거짓말과 질투로 얼룩진 날들이 몇 년 지났다고 젊은 날의 치기였다는 듯이 담담한 말투로, 헤어지고 나서 이것 저것 바쁘게 지내다 보니 금세 잊었다고 생각 했는데 갑자기 네가 방귀 뀌었던 일이 생각나서 혼자 길 걷다가 미친놈처럼 웃었었다고. 그녀도 맞장구 치며 나도 내가 네 코에 손 집어 넣었다가 입에 넣었을 때 네 표정이 갑자기 생각나서 웃었다고. 많지도 적지도 않은 웃음들로 소주 네 병을 비워가다가,
'이걸로 됐다. 웃을 수 있어서 됐고, 너도 기억해 주어서 됐다' 라고 생각하며 포장마차를 나와 걷는다. 옆에 걷고 있는 사람과 나의 모습을 영화 처럼 되새겨 본다. 문득 그녀가 '불안한 세상속에서 너라는 희망을 품었던게 욕심이었단걸 알았다'고 한다. 말이 끝나고도 한참을 한 발 한 발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않고 걷다가, 택시를 잡고 그녀를 먼저 태운다.
내가 뒤따라 타서, 기사님한테 내가 사는 곳을 얘기한다. 나를 돌아보며 웃는 그녀의 미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도 눈으로 그 무게감을 아직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집에 들어와 잭 다니엘을 마신다. 방에 들어오니 나른하고 취하지만 말이 많아지지 않는다. 그녀도 말이 없다. 방 안엔 이루마의 피아노 소리만 울려 퍼지고 나는 행복함을 느낀다. 이 공간 안에 있는 사람과 공기를 채운 음악과 식도를 내려가는 위스키의 따뜻함에 감사하며. 그동안 고마웠던 마음, 미안했던 마음, 미웠던 마음, 다시 만나고 싶었다고, 다시 만나면 절대 행복하지 않을거라고 계산했던 나, 그런 생각을 똑같이 해왔던 그녀. 침대보다 뜨끈한 바닥이 좋다며 누운 그녀 옆에 나란히 눕는다.
그렇게 나갔을 때 옷을 그대로 입은채 잠든 그녀를 보다가, 1년 365일을 발정난 개처럼 살아가는 남자라도 오늘은 어른이라며 스스로 뿌듯함에 미소를 짓다가, 이불을 덮어 주고 그녀를 안고 잠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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